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정운오, 그가 본 미래
  • 작성일 2025.07.22.
  • 작성자 고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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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운오 교우(상과 1941년 졸업)
유족의 기부로 건립된
정운오IT교양관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정운오, 그가 본 미래

정운오IT교양관

일제 강점기,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며 나라를 되찾을 미래를 바라던 학생 정운오. 광복 후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고도,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주변을 섬겼던 그는 훗날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한 모교에, 후배들이 더 큰 미래를 준비하도록 값진 선물을 보냈다. 그의 유족은 늘 모교의 후배들을 돕기 원했던 부친의 뜻을 기리며 본교에 200억 원을 기부하여 <정운오IT교양관>을 건립했다.

1930년대 중앙도서관 전경

보성전문학교의 1907년 제1회 졸업식

보성전문학교 이화장(李花章)

일제 치하, 겨레의 염원을 담은 보성전문학교에서 학생 정운오가 본 것

그가 보성전문에 입학해 공부할 무렵은 김성수 선생이 1932년 학교를 맡은 후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여, 일본의 사립대학 못지않은 시설을 세웠을 때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입학 무렵 준공된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된 중앙도서관은, 김성수 선생이 직접 전국으로 모금 운동을 다니며 모아 온 전 국민의 성금을 통해 건축됐다. 여전히 일제 통치의 고통 속에 있지만 교육을 통해 나라를 찾겠다는 민족의 굳은 의지에 힘입어, 보성전문학교는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스승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의 등불이 되었다.

국민의 기부로 세운 중앙도서관과 대운동장

1938년 7월에는 대운동장이 준공됐다. 단일 학교 운동장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대한의 겨레는 국권 회복의 희망이 될 청년들을 위해서라면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성원에 보답하듯 같은 해 9월, 보성전문학교의 농구부가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일제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서도, 보성전문의 학생들은 민족에게 위로이자 희망이었다.

1940년대,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과 학도병 징집을 명했지만, 보성전문 학생들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강제로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변경했으나, 해방 후 학교는 교명을 보성전문학교로 환원했다.

일제 강점기라는 그늘진 역사의 한가운데, 교육구국의 뜻으로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를 다닌 정운오 교우. 그는 졸업과 해방 후 '한강호텔'을 설립하고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일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고, 때마다 청년들을 지원하고 모교의 후배들을 돕고자 했다.

그가 보성전문 학생 시절 경험한 전 국민 모금 운동의 힘, 학생들을 위해 전 국민이 최고의 도서관과 대운동장을 세운 기부의 힘을 그는 평생 기억하지 않았을까.



개교 120주년, '보성전문'의 정운오가 '민족고대'에 보낸 미래

그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지 84년이 지나 '정운오IT교양관'이 그가 공부한 서울 캠퍼스에 세워졌다. 그의 아들 재욱 씨와 네 딸 재은, 윤자, 인선, 혜선 씨가 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거액을 기부한 것이다.

지하 2층, 지상 10층, 연면적 2만 4,606㎡ 규모, 최첨단 시설을 갖춘 교양 물리·생물·화학 실험실이 마련됐고, 캠퍼스 곳곳에서 흩어져 진행되던 교양 실험과 실습이 한 건물에서 이뤄지게 됐다.

이곳에 자리한 반도체공학과 연구실, 정보보호대학원 연구실 및 강의실, 산학협력단, 스마트모빌리티학부 연구실에서 반도체, 정보보안과 같은 첨단 분야의 연구와 교육이 활발히 이뤄진다. 그가 그 당시의 새로운 도서관에서 공부했듯이 후배들도 새로운 첨단 인프라에서 마음껏 공부하게 된 것.


자연계 융합 인재를 키우기 위한 최 신 교육 인프라, 정운오IT교양관

'교육구국'을 위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세운 첫 학교가 120주년을 맞는 해, '보전 학생 정운오'가 오늘의 '민족고대'에 보낸 선물은 다시 한번 오늘의 청년들을 키워 우리나라와 세계의 미래를 준비하게 한다. 고려대는 그의 새로운 꿈을 이어 세계의 미래를 세워 갈 Next Intelligence를 키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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