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설되지 못할 뻔했던 수업, 인기 교양이 되다
사실 '생물다양성과 진화'는 고려대 교양 과목으로 처음 제안되었을 때 한 차례 심사에서 탈락했다. '생물다양성'이라는 말이 주는 전문적인 어감 때문이다. "이런 과목을 어떻게 교양으로 하냐며 부적절하다고 했죠. 전공 과목처럼 들린다고요." 배 교수는 개설 당시를 회상하며 웃었다.
하지만 배 교수는 전공자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학생이 알아야 할 기본 소양으로서 이 과목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마침내 정식으로 강의가 개설됐다. 수강생 50명으로 시작한 수업은 현재 매 학기 300명 이상이 신청하는 대형 강의로 자리 잡았다. "강의를 아주 재밌게 하진 않아요. 그런데 학생들이 오히려 이 내용을 원하더라고요. 기후 위기나 생태계 문제가 더는 남 얘기가 아니니까요."

배연재 교수



❶ 소똥구리 (몽골, 2014)
❷ '세계에서 가장 작은' 꼬마잠자리 (캄보디아, 2010)
❸ 표범무늬 도마뱀 (몽골, 2014)
국립생물자원관 관장, 한국곤충연구소 소장,
배 교수의 다양의 현장 경험이 녹아든 강의
수업은 생물다양성의 정의와 기원, 생물군의 진화, 자원의 지속 가능한 활용, 그리고 보전 전략까지 총 4부로 구성된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기업의 ESG 전략 등 사회 시스템과 생물다양성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도 짚으며, 과학을 삶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도록 이끈다.
배 교수는 국립생물자원관 관장, 한국곤충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한 생물다양성 분야의 국내 최고의 전문가다. 야외 조사와 실험실 연구는 물론, 정책 수립과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와 공동 주최하는 국제 포럼까지 경험한 그는 말 그대로 현장과 이론을 모두 아우른다. "소똥구리 복원, 청계천 생태계 조사, 몽골 사막에서의 곤충 연구까지— 강의 자료는 모두 제가 직접 조사하고 촬영한 것들입니다."
학생들은 생생한 자료에 반응한다. 신소재공학부 22학번 김도현 학생은 어린 시절 사슴벌레를 키웠던 기억이 수업을 듣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과의 박종범 학생은 모기의 천적을 활용한 방제 전략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하며 교수님의 현장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야기들 덕분에 지식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진화론부터 ESG까지, 전공의 경계를 넘는 융합 수업
진화론, 종의 개념, 보전 생물학, 생물자원의 활용, 유전자원 공유와 국제 협약, ESG 경영 전략까지, 이 강의가 다루는 주제는 폭넓고 깊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게 제 몫이에요. 전공 이론이 많지만, 교양 수업이니만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죠."
대형 강의임에도, 수업 후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질문이나 과제를 통해 오가는 대화 속에서 교수는 종종 놀라운 순간을 마주한다. "ESG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에, 학생들이 먼저 그 개념을 적용해 과제를 써 온 적이 있어요. 문과생, 미대생, 문학 전공 학생들까지도 자기 분야에서 생물다양성을 접목할 방식을 고민하더라고요."
학생들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확장할 기회로 이 수업을 활용하고 있었다. 박종범 학생은 자신이 범고래에 매료된 계기를 이야기하며, 고래의 진화 과정을 찾아본 경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예전부터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챙겨 보며, 고래가 어떤 방식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궁금했어요. 수업을 들으며 그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해결됐어요." 과학 전공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고, 교과서 너머의 질문과 사유가 살아 있는 수업이라는 점에서, '생물다양성과 진화'는 진정한 교양의 맛을 경험하게끔 한다.
생물다양성의 핵심 메시지, 공존
배 교수가 강조하는 수업의 최종 목표는 과학 지식의 축적보다, 다양한 생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함께 사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다윈 진화론의 영향과 경쟁 중심 사회의 한계를 설명하며, 수업의 종착점을 이렇게 정의한다. "생물다양성의 핵심은 '공존'입니다. 생태계 안에서 서로 다른 종을 인정해 주고, 같이 사는 룰을 만드는 게 공존이거든요. 그 철학을 배우는 게 이 학문의 마지막 종착점이에요."
이 철학은 현재 배 교수가 집필 중인 교재의 머리말에도 담겨 있다. 생물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수업, 경쟁 중심의 사회 속에서 겸손과 배려의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이 강의는, 과학이 삶의 태도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의 위기가 개인의 위기로 다가오는 시대, '생물다양성과 진화'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조용히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