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갤럭시, 크래프톤, 현대자동차, LG유플러스, TVING, 숨고,카카오, 롯데면세점, 파라타항공. 엘레멘트컴퍼니(이하 LMNT) 최장순 대표의 손을 거친 기업은 단단한 철학과 매력적인 디자인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대학 시절 언어학, 철학, 기호학을 통해 '사유하는 방식'을 배운 그는, 최근 산업 현장에 기호학적 원리를 적용한 업적을 인정받아 세계아시아기호학회에서 '기호학혁신프론티어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겸임교수로 '응용기호학'을 강의하며, 학계와 산업을 잇는 가교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분야별로 선별된 책과 색색깔의 메모로 가득 찬 LMNT 사무실에서, 최 대표에게 그만의 브랜딩 비결을 물었다.
공부하는 태도를 배운 대학 시절
최 대표가 처음부터 브랜드 전략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가 궁금해한 것은 종교와 언어의 관계였다. 원어로 성경을 읽고 싶다는 마음, 언어를 통해 세계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고려대 언어학과로 이끌었다.
학생 시절의 기억은 낭만적이라기보다 치열하다. 끼니를 거르던 날, 선배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매점 근처에 앉아 있던 기억, 술자리에서도 선배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무릎 위에 노트를 펴고 개념을 받아 적던 기억, 차가 끊긴 밤 벤치에서 신문지를 끼고 추위를 버티며 자다 민주광장의 불빛에 깨던 기억.
언어학, 철학, 기호학을 습득하는 과정도 치열했다고 기억한다. 특히 김성도 교수의 수업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워낙 이해하기 어려운 수업이었는데 열심히 듣고 레포트도 내다 보니 선생님께서 2학년 1학기 때 대학원 수업을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1년 정도 대학원 수업에 참여했어요. 정말 강도 높은 수업이었어요. 일주일에 영어 원서 1권, 독일어·불어 텍스트 100페이지씩, 그걸 다 읽어야 했거든요."
이해하기 어려운 강의와 높은 수준의 과제를 따라가며 그는 언어가 세계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이 경험은 이후 그가 브랜드를 다루는 방식의 근간이 됐다.
브랜딩에 뛰어든 언어학 전공자의 분투기
졸업 후 그가 진로를 선택한 기준은 의외로 단순했다. "대학에서 공부한 게 아까워서, 기준은 딱 하나였어요. '언어학 전공을 쓸 수 있는 곳에 가자'." 막상 찾아보니 그런 자리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운 좋게 언어학 전공자를 뽑는 브랜딩 회사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브랜드 전략을 시도한 '브랜드앤컴퍼니'라는 회사였어요. 브랜드 자산 평가의 측정 가능성을 정립한 버클리 대학의 데이비드 아커 박사와 독점 파트너로 일하는 회사였는데, 운 좋게 그곳에 '네이머'로 취업을 한 거죠."
학문적 배움을 산업에 적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언어학 전공자로서 '음성학', '형태론' 등을 활용한다는 점은 좋았지만, 선배들은 '소질 없으니까 그만둬' 혹은 '대학원에나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인문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브랜딩에 접근했고, 2017년 LMNT를 설립하여 현대자동차 R&D 비전, 항공사 브랜드 구축, AI 관련 프로젝트 등 다양한 브랜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현대차 R&D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모빌리티의 미래에 대해 엄청나게 공부했어요. 정의선 당시 부회장께서 'Beyond the Car'라는 슬로건으로 압축된 비전 전략을 직접 발표하셨죠. 성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오너가 직접 나서지 않아서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에는 파라타항공이라는 LCC 항공사의 브랜드를 만들고 비행기 날개와 동체에 적용할 리버리 디자인(livery design)까지 진행했는데요, 기호학, 그리스 철학, 카를 마르크스, 들뢰즈의 철학을 적용해서 컬러를 도출하는 등 재미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 외에도 카카오 AI 캠퍼스, 숨고 프로젝트 등,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요."
2천억에서 1조로, 기업 가치를 키우는 브랜딩의 힘
최 대표의 브랜딩은 치밀한 구조적 사유와 맥락적 사고에 기반한다. 많은 기업이 이름을 정할 때 후보 A와 B의 장단점을 비교하지만, 그는 그보다 먼저 그 이름이 어떤 맥락에서 발신되고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지 살핀다. 소비 환경, 상업적 맥락, 심리학 이론, 그 브랜드가 시장에서 점유하고자 하는 고유한 영역과 내러티브까지.
그는 실제 사례를 들었다. 한때 2천억 원대 기업가치를 지녔던 한 기술 회사는 스스로를 '카메라 인식 기술 회사'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LMNT는 그 표현이 시장 안에서 충분한 가치를 얻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대신 사업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 '비전 AI 컴퍼니'라는 언어를 제안했고, 홈페이지와 메시지 체계도 함께 정비했다. 이후 회사는 새로운 이름 아래 더 적극적으로 자기 가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그 가치가 1조 원대로 성장했다.
최 대표는 "그게 바로 언어의 힘"이라고 말한다. 브랜딩은 '포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브랜딩에서는 이상적인 메시지와 현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실현 가능한 메시지를 설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기업이 그 메시지를 공적으로 약속하도록 만들고, 그 약속을 향해 실제 비즈니스가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것이 브랜딩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너무 이상적이고 당장 적용하기 어려운 메시지라도, 일단 공론장에 올려놓으면 쉽게 무시하기 어렵거든요. 정치인이 공약을 내세우면 결국 지키려는 압력이 생기는 것처럼, 언어가 행동을 견인하는 장치가 되는 거죠."


(위) 2025년 토리노대학교 기호학 학회 단체사진. 마시모 레오네 교수, 김성도 교수 연구팀과 함께한 심포지엄에서 브랜드 기호학 실무 사례를 발표했다.
(아래) 2023년 LMNT의 자체 오피스웨어 브랜드 ‘EciffⓇ’ 기획 과정. 최 대표는 ‘office’를 뒤집은 애너그램에서 출발해 브랜드를 기획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익숙한 언어를 의심하며,
어제보다 더 나은 해석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누구나 삶의 기획자입니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과정 역시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축이다. 그는 설득의 출발점을 '이론적 정합성'에서 찾는다. "브랜딩은 결국 경영학이기 때문에 케이스 스터디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케이스가 있으니 우리도 해보자'에 그치고, 왜 지금 이걸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빠져 있어요. 저는 앞에 이론적 정합성을 먼저 깔아놓는 편입니다."
그는 기호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의 정의를 예로 들며, 설득은 결국 '상대의 조건'을 읽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기호(sign)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대신해서 나타내는 무언가다"라는 문장에는 "어떤 면(respect)이나 명목(capacity)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가령 금은 어떤 상황에서 '화폐'라는 명목으로 쓰이고, 다른 상황에서는 '금속'이라는 명목으로 쓰이죠. 설득에서 중요한 건, 내 언어와 상대의 언어가 서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명목으로 다르게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그는 이를 위해 클라이언트의 전문 분야와 의사결정 환경을 면밀히 살핀다. 이러한 정보는 메시지의 '뉘앙스'를 조율하는 기준이 된다. "사실 이론적 근거는 누구나 만들 수 있어요. 그런데 실제 설득은 90%가 뉘앙스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때는 '이 사람 내 편이네'라는 감각 하나로 결정이 나기도 하거든요. 저는 단어에도 경제적 수익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포장보다 중요한 것, 내러티브
LMNT의 차별점에 대해 묻자 그는 '인문학적 성향'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회사에서는 주기적으로 스터디와 레슨이 열리고, 하나의 현상도 철학과 기호학의 언어로 다시 읽어 본다.
"월요일 오전마다 전체 회의를 하는데, 종종 제가 강의를 해요. 예를 들면 '최근 큰 인기를 얻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에 맞춰서 한번 해석해 볼까?' 하면서 제가 해석한 내용과 개념을 알려주고, 이 내용을 BX나 UX 디자인에 적용하면 어떤 방법론이 도출될지 고민한 결과를 보여주고, 동료들의 의견을 받아 실제 프로젝트에 적용해 봐요. 다른 회사에서는 잘 안 하는 것들이죠."
또한 그는 소비자가 끝내 반응하는 것은 짧은 자극이 아니라 오래 버틸 수 있는 서사라고 강조했다. '디자인이 튀는가', '문장이 섹시한가'보다 중요한 것은 '10년 후 미래까지 지속될 수 있는 내러티브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LMNT는 기업의 현재만 보지 않고 계보학적 흐름을 중시한다. 창업 초기의 가치, 세대를 거치며 변해 온 철학, 때로는 조직 내부에서 외면하고 싶어 하는 과거까지 다시 살핀다.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여도 과거의 가치가 현재에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 때, 브랜드는 더 깊은 지지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기호학적 화해'라고 불렀다. 가령 후대 경영진이 선대의 가치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보여주면 훨씬 더 큰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기업의 역사와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들을 찾아내서 실로 엮어요. 저희가 그런 작업을 잘하는 편이에요."
결국 남는 것은 의미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의미죠."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그는 기호학을 만난 이후 20년 넘게 의미 작용에 대해 고민해 왔다고 했다. 왜 동남아의 젊은 세대는 치아 교정기를 감추지 않고 부의 상징이자 트렌디한 기호로 드러내며 웃는지, 왜 중국 SNS 속 거실에는 언제든 떠날 수 있음을 과시하는 캐리어가 놓여 있는지. 남들에겐 그저 스쳐 지나갈 풍경일지라도 그에게는 모두 문화적 맥락을 담은 기호다.
"세상을 초월하는 무언가는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는 그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사라졌다'는 의미만은 남으므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의미이며, 자신은 의미를 연구하고 의미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후배들에게도 그는 거창한 스펙보다 '한 권을 씹어 먹는 경험'을 권했다. 어려운 텍스트를 붙들고, 토론하고, 쓰고, 비평받는 경험.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관점으로 다시 해석해 보는 경험. 최장순 대표가 대학 시절 배운 것도, 지금까지 브랜드를 다루며 놓지 않는 것도 결국 그것이었다 . 세상을 이루는 것은 사물만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루고자 하는 태도 말이다.
SPECIAL
AI 시대에 생존하는 브랜드, 그리고 '인간다움'을 지키는 방법

Q1. AI 시대에도 오래 살아남는 브랜드는 어떤 브랜드인가요?
A. 저는 앞으로 거의 모든 산업이 'U자형'으로 양극화될 것이라고 봅니다. 한쪽에는 AI를 통해 빠르고 저렴하게 생산되는 효율 중심의 영역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지닌 가치 중심의 영역이 존재하게 되죠.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어볼까요. 자율주행이 상용화되면 단순히 출퇴근 기능만 수행하는 차들은 점점 값싸고 평준화될 것입니다. 이동이라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같은 브랜드는 살아남을 겁니다. 이들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운전의 재미'그 자체를 파는 브랜드이기 때문입니다. 자율주행이 필요 없는,내가 직접 운전해야만 느낄 수 있는 그 고유한 가치는 더 비싸질 수도 있어요.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효율과 기능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만이 구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Q2. 대표님은 AI를 위협이 아니라 도구이자 파트너로 보신다고요. 어떻게 활용하시나요?
A.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입니다. 공부할 때나 어떤 연구 모델링을 할 때 AI를 많이 돌려보거든요. 예전 같으면 브랜드 자산 모형 하나를 설계하는 데만 수억 원의 비용과 방대한 시간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흩어져 있는 검증값들을 취합해서 단숨에 초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은 AI를 '나를 반박하는 존재'로 두는 것입니다. 사실 조직 내에서는 제가 대표라는 위치에 있다 보니, 동료들이 제 의견에 바로 반대하거나 허점을 짚어내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거든요. 제가 헛소리를 해도 "한 번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하고 물러날 때가 있죠. 그런데 AI는 그런 게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제 논리의 약점을 찾아내게 하거나,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도록 시킵니다. 일종의 '레드팀(RED TEAM)'역할을 맡기는 겁니다.
Q3. 그렇다면 AI 시대에 더 중요해지는 '인간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A. '언어화되지 않는 아날로그적 감각'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장면을 마주했을 때,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왠지 쎄하다'거나 '이건 성공하겠다'는 직감을 받곤 하죠. 이것은 인간이 아주 오랜 시간 세포 단위로 축적해 온 설명할 수 없는 빅데이터입니다. 기계는 방대한 정보를 처리해 가장 안전한 '평균값'을 내놓는 데 능숙하지만, 인간은 그 평균에서 벗어나는 지점을 감지해 내는 고유한 힘이 있습니다. 최근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최강록 셰프의 사례가 좋은 예입니다. 탈락한 셰프들의 공통점을 보면 대개 심사위원이 선호할 법한 정답, 즉 '평균값'에 자신을 맞추려 했습니다. 반면 최강록 셰프는 자기다운 방식으로 밀어붙였죠. 결국 미래에 선택받는 사람은 기계를 도구로 능숙하게 다루는 동시에,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감각을 지킨 사람일 것입니다.
Q4. 대표님이 생각하는 '나다운 인재'란 어떤 사람인가요?
A. 사실 '나다움'은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회사 대표일 때와 교수일 때, 친구일 때와 가족일 때 전부 다르니까요. 저의 경우에는, 직업적 세계에서의 나다움으로 한정해서 생각했을 때, 인문학적 진정성을 잃지 않는 태도가 '저답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계속 공부하고, 익숙한 언어를 의심하고, 어제보다 더 나은 해석을 만들어내려는 사람. 그게 제가 생각하는 '나'에 가깝습니다. 결국 좋은 브랜드도, 좋은 기획자도 자기만의 해석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익숙한 언어를 의심하며, 더 나은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다움'의 본질이자 기획자가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기획이란 "어떻게 하면 될까?"에 답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일상의 기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남들이 만들어놓은 의미를 인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