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에서만 40년. 1986년 입학해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친 김순남 교수의 시간은 곧 고려대학교의 시간과도 포개어진다. 현재 세종캠퍼스 문화유산융합학부 소속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조선 전기 정치사와 조선왕조실록 연구를 오랫동안 이어온 연구자다. 최근에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자문에 참여하며 대중문화와 역사 연구의 접점을 넓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력만으로 김 교수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학 시절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생이었고, 지금은 영탁 콘서트를 따라 전국을 다니는 열성 팬이기도 하다. 문과대학 서관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울면서 적응한 캠퍼스, 한문 공부로 돌파하다
김순남 교수의 대학 첫 기억은 잿빛에 가깝다. 1986년 입학 당시, 사회는 군부 독재의 끝자락에 놓여 있었고, 대학은 그 격랑 한가운데 있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여대생의 눈에 비친 캠퍼스는 배움의 전당이라기보다 엄혹한 시대의 최전선이었다.
"제가 입학한 86년에는 시절이 너무 엄혹했어요. 입학하자마자 휴교령이 내렸거든요. 전날 시위 때문에 최루탄 가루가 자욱하게 남아 있어서, 학교에 올 때 거의 울면서 들어왔어요. 그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적응을 못 해서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때는 저뿐 아니라, 도피처를 찾는 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시절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옛 교양관의 음악감상실이었다. 깜깜한 감상실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클래식을 들으며 그는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를 진짜 일으켜 세운 것은 '공부'라는 정공법이었다. 입학 첫해의 끝 무렵,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던 동기들과 함께 논어와 맹자를 강독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온 친구, 전국 각지에서 온 동기들과 '우리는 사학과니까 한문이라도 제대로 해보자'며 의기투합했죠.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 문장을 읽고 뜻을 나누는데, 똑같은 구절을 보고도 해석이 다 다른 게 너무 신기했어요. '쟤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하는 호기심이 저를 붙들었습니다 . 그 친구들과의 공부가 제 버팀목이자 지지대였던 셈이죠.


(위)1986년 11월, 출입이 통제된 고려대학교 정문
(아래)고전음악감상실의 현재 모습
조선왕조실록이 열어준 연구의 세계
한문 공부에 재미를 붙이자, 입학 선물로 아버지가 사주신 뒤 1년 넘게 책장에 잠들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영인본'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서양사를 전공한 아버지는 자식 중 한 명은 한국사를 하길 바랐다. 한문이라는 장벽이 허물어지자 실록이라는 거대한 기록의 바다가 열렸다.
"그 책을 다시 꺼내보니까 '어, 이걸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어 공부를 하면 원서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똑같죠. 교수가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그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친구들과 토론하며 해석의 차이를 느끼는 게 즐거웠거든요. 다른 선택지를 진지하게 상상해 본 적이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연구의 세계로 들어왔습니다."
김 교수가 조선시대 역사에 매료된 이유는 그 정교함에 있었다. 조선을 낙후된 국가로 치부하는 시선에 대해 그는 실록의 기록으로 반박한다. 그가 읽어낸 조선은 임금과 신하가 격렬하게 토론하고, 시스템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져가는 '아름다운 완결성'을 가진 나라였다.
"연구자로서 논문을 쓸 때 내 주장을 증빙해 줄 기록을 딱 찾아내는 순간이 있어요. 그건 진짜 '극락'이에요. 연구자만이 알 수 있는 즐거움이죠. 퍼즐 조각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과정이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자신이 세운 가설을 사료 한 줄이 입증해 줄 때의 그 쾌감, 그 맛 때문에 이걸 못 놓는 거예요. 완전히 중독이죠."
이러한 즐거움을 강단에서도 전하고자 하는 그는 역사를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언어로 들려주려고 노력한다. '우리 역사 속의 라이벌', '조선왕조실록의 세계' 등 이름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의 수업은 사극 드라마나 영화, 노래 같은 시청각 자료를 적극 활용하며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가설을 입증해 주는 사료를
딱 찾아내는 순간은 정말 '극락'이에요.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과정이 연구의 재미죠."
『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 | 푸른역사
〈왕과 사는 남자〉의 숨은 공신
연구에 대한 그의 전문성과 애정은 대중문화와의 협업에서도 빛을 발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자문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가 펴낸 《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푸른역사)라는 저서 덕분이었다. 제작진은 세세한 것들을 물어왔다. '당시에 네모난 책상을 썼는지', '죄인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영월 관아의 규모는 어땠는지' 등이다.
"자문은 사실 돈도 안 받고 물어보는 것에만 답해 주는 일이에요.(웃음) 하지만 기록으로 고증해야 하니까 문종, 단종, 세조실록을 다 뒤졌죠. 촬영 현장인 남양주까지 가서 촬영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엄흥도가 단종의 목을 조르는 장면을 여러 번 찍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실제 기록 속 엄흥도는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지 죽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작진에게 이 부분을 세련되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죠."
역사학자로서의 날카로움 뒤에는 반전 매력도 있다. 7년째 이어오고 있는 가수 영탁을 향한 '덕질'이다. "코로나 시절 우연히 시작했는데, 귀찮아서 집에서 300보도 안 걷는 제가 전국 투어를 다녀요. 몸은 피곤한데 도파민이 치솟는 걸 느껴요. 영탁의 음악 세계를 보면 우리 연구자들이 논문 쓰는 것과 참 닮았어요. 남의 노래를 공부(선행 연구)하고, 자기 의지로 곡을 쓰고(논문 집필), 평가받는 과정이 그렇거든요. 창작과 연구는 결국 맞닿아 있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고려대와의 40년 인연, 결국 '사람'을 얻었습니다
집에서는 예민한 성격 탓에 '청어 가시'라 불렸고, 학교에서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던 김 교수가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연구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를 묵묵히 지켜봐 준 스승이 있다.
"지도 선생님은 저를 보고 늘 '럭비공' 같다고 하셨어요. 공부하다가도 갑자기 춤을 추러 가고, 울다가도 금세 놀러 다니는 제 모습이 선생님 눈에는 붕 떠 보였을 거예요. 참 많이 혼나기도 했고요. 하지만 선생님은 말썽꾸러기 제자를 끝까지 놓지 않고 찬찬히 다듬어주셨습니다. 연구자는 너무 바쁘게 살면 안 된다, 지긋이 앉아 사료를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그 마음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인터뷰의 끝자락, 김 교수는 고려대에서의 40년 세월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사람'을 꼽았다. 젊은 날을 함께한 동기들, 서투른 자신을 꾸짖고 달래준 선배들, 그리고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학생들까지. 최근 발표 주제를 위해 왕복 7시간 거리의 경남 사천까지 직접 답사를 다녀온 학생을 보며 큰 감동을 얻었다는 그는, 이제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40년 동안 고려대에서 만났던 이들이 지금 제가 살아가는 바탕이자 나침반이고, 신호등이자 거울이에요. 처음 강사 시절, 60대 만학도 학생이나 공장을 운영하던 재입학생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성적을 짜게 줬던 게 지금도 후회로 남아요. 그만큼 제자 한 명 한 명이 소중해진 거죠. 모범적으로만 살아온 건 아니지만,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써왔거든요. '내가 저 선생한테 배웠어'라고 말할 때 부끄럽지 않은 선생이자 어른이고 싶습니다. 나아가 '우리 선생님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좀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사료 한 줄에 여전히 전율한다며 반짝이는 그의 눈빛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호기심뿐만 아니라 삶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와 같은 역사학자들 덕분에, 오늘도 과거는 현재를 돕는 배움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